13대종사와 대강사를 배출한 대둔사(대흥사)는 우리나라 31본산(本山)의 하나이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22교구본사(敎區本寺)로 해남(海南) · 목포(木浦) · 영암(靈巖) · 무안(務安) · 신안(新安) · 진도(珍島) · 완도(莞島)등 8개 시군의 말사(末寺)를 관할한다. 백두산(白頭山)의 영맥(靈脈)이 남으로 뻗어내려 소백산맥 자락에 지리산을 만들더니 영암의 월출산을 지나 한반도의 최남단(最南端)에 이르러서 융기한 두륜산 중턱에 이 가람(伽藍)이 있다.

대흥사는 해남읍에서 12km지점, 행정구역으로는 해남군 삼산면(三山面) 구림리(九林里)에 속한다.

대둔사(대흥사)는 신라 진흥왕(眞興王) 5년(544)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創建)하였다. 사찰 경내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 · 침계류(枕溪樓) · 명부전(冥府殿) · 백설당(白雪堂) · 대향각(大香閣) · 천불전(千佛殿) · 용화당(龍華堂) · 봉향각 · 동국선원 · 표충사(表忠祠) · 강례재 · 서산대사유물관(西山大師遣物館) · 대광명전(大光明殿) · 보련각(寶蓮閣) · 일로향실(一爐香室) · 청신암(淸神庵) · 진불암(眞佛庵) · 일지암(一枝庵) · 만일암(挽日庵) · 북미륵암(北彌勒庵)등이 있다.

석탑으로는 대흥사 응진전(應眞殿)앞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320호), 북미륵암(北彌勒庵)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301호), 북미륵암 동탑(東塔), 만일암지(挽日庵址) 오층탑 등이 있다.

대둔사(대흥사)에는 56기의 부도(浮屠)가 있다. 한사찰의 경내에 이처럼 많은 부도가 조성된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곳이 유일하다. 이처럼 많은 부도가 조성된 것은 조선시대의 불교조각사(佛敎彫刻史)와 불교사상사(佛敎思想史)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해남지방에서 이와같은 다량의 부도조성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선시대 후기에 많은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이곳 전남 지방에서 배출(排出)되었고 그 시대에 그 많은부도를 조각해 낼 수 있었던 사회적 문화적 역량(力量)또는 그 전수기법(傳授技法)이 살아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대둔사(대흥사)는 입구에서 시작되는 4km쯤의 수림(樹林)터널을 지나서 4계절 내내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약 2,400ha의 산세(山勢)로 유명하다. 흔히 말하기를 '두륜산(대둔사)의 특징이 뭐냐'고 묻노라면 '뚜렷한 특징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봄이면 수줍은 신록을, 여름이면 무성한 녹음을, 가을이면 은은한 단풍을, 겨울이면 고담(枯淡)한 맛을 풍기는, 마치 어머니의 품속같은 편안 함을 느끼게 된다. 굳이 대흥사의 자랑거리를 든다면 창건이래 13 대종사(大宗師)와 13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유명한 도량(道場)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학자와 시화묵객(詩畵墨客)이 청교(淸交)했던 곳,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 하여 창건 후 한번도 재앙이 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서예(書藝) 전시를 방불케 한 듯 추사(秋史) 김정희의 무량수각(无量壽閣),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침계류(枕溪樓)와 대웅보전(大雄寶殿), 이삼만(李三晩)의 가허루(駕虛樓),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두륜산대둔사(대흥사), 김돈희(金敦熙)의 용화당(龍華堂), 강암(剛菴) 송성용(宋成庸)의 일주문(-柱門)등의 현판(懸板) 또한 돋보인다.
해남이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하여 벽지라고 하나 이웃 강진·완도 진도의 중심에 위치하여, 시가(詩歌)·민요(民謠)·판소리·도자(陶磁)·건축(建築)등을 망라한 독특한 유배문화권(流配文化圈)을 형성하였거니와 그 매개역할을 한 곳이 대둔사(대흥사)였다.

대둔사(대흥사) 북미륵암을 넘으면 곧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유배생활을 하던 강진의 귤동에 이른다. 다산은 해남 연동(蓮洞) 외가댁(外家宅)인 윤선도의 고택에 내왕하면서 대둔사(대흥사)를 거치게 되는데, 이래저래 혜장(惠藏)과 완호(玩虎)와 초의(草衣)를 대하기 마련이며 만났다 하면 학문과 도의와 예술과 차를 논하게 되었다.

초의와 완당과의 학연(學緣)은 널리 회자(膾炙)되었거니와 완당이 제주에 유배되는 무렵 대둔사(대흥사)에 두 번 내왕했었고 초의는 무수히 상종하였다. 그들 두 천재(天才)의 교분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하겠다.
거기에 해남 우수영(右水營)의 수사로 와있던 위당(威堂) 신관호(申灌浩)가 끼어 들었고 진도(珍島)의 허소치(許小痴)가 초의 문하에 들게 되는 등 대둔사(대흥사)는 불교 도량임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조 후기(後期) 특유의 한문화의 장(章)을 여는 역할까지 했던 곳이다.

대둔사(대흥사) 일원은 1979년 도립공원(道立公園)으로 지정되었고 경내에 있던 숙박업 · 요식업등 상가가 모두 집단시설지구로 이주하여 본 모습으로 복귀하였다.
 
많은 전각과 암자가 들어선 대둔사(대흥사)의 유물유적 가운데 진수는 천개의 불상을 모신 천불전이다. 제작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옥으로 만들어진 정교하고 신비스러운 천불상이 불자는 물론 속인들에게도 불심을 갖게 한다. 지난 74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된 천불전은 참석으로 쌓아 올린 석축 기단위에 세운 팔작(八作)지붕의 목조건물이다. 전면 3칸 측면 3칸 12량의 주량으로 축조된 이 불당은 직경 70cm가량의 거대한 괴목을 사용한 다포집(多包)계통의 건축물로 유명하다.

특히 국화문, 연화문, 무궁화문 등을 누각한 문짝들은 조각가의 심혈이 투영돼 정교함이 드러나고 있다.

겉 벽면 3면에 걸쳐 심우도(尋牛圖 : 소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소를 찾을 수 있다)와 대행보현보살(大行普賢菩薩), 대지문수보살(大智文殊菩薩)등 15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북단 벽에는 신중탱(神衆탱)과 사천왕탱(四天王幀)등 불화(佛畵)가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돼 있어 조선 후기 불화양식을 고찰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그곳 탱화는 초의(草衣)선사가 증사(證師)로 되어있어 눈길을 끈다. 그리고 건물 내부는 장주(長柱)를 사용하지 않은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천불전에 안치된 천불상은 지난 74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됐다. 중앙에 위치한 삼존불(三尊佛)은 목조물이지만 그 주위를 둘러싸인 천 불은 옥으로 만들어져 신비함을 더 한다.

"과거에도 천 불, 현재에도 천 불, 미래에도 천 불"

천가지 형태를 가진 천불상은 어느 때 어느 곳 에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나타내는 극치의 작품이다.

구전에 따르면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 스님이 처음 천불전을 짓고 경주(慶州)에서 생산된 옥석으로 조각을 하게 했다.

10명의 조각사가 6년에 걸쳐 완성한 천불을 3척의 배에 나눠 싣고 울산과 부산 앞 바다를 지나 대둔사(대흥사)로 향했다. 항해 도중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일본 장기현(長崎縣)에 밀려가니 일본인이 3백여개의 옥불(玉佛)을 만나 서둘러 절을 짓고 봉안(奉安)하려 했다. 그러나 이 불상들이 일본인의 꿈에 나타나 '조선국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된다'고 깨우치니 결국 일본인들은 옥 불을 거두어 해남으로 보냈다. 일본을 거쳐서 온 불상들은 밑바닥에 '日'자가 새겨져 있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천불전에 안장된 옥불들은 신도들의 꿈에 나타나 다시 한번 기이함을 보였다. 경상도 지역 신도들의 꿈속에서 불상들이 '가사를 입혀달라'고 한 것이다. 결국 신도들은 가사를 만들어 입히고 4년마다 새 가사로 갈아 입히고 있다.

갈아 입힌 다음 남은 가사는 모조리 신도들이 챙겨가는데 이 가사를 소지한 사람은 무병장수(無病長壽)하고 만사형통(萬事亨通)한다고 전해 온다.

각각 다른 형태의 상을 지닌 채 신비로움을 간직한 천불상은 불자는 물론 세파(世波)에 찌든 범인(凡人)들에게 세상의 참된 이치를 묵묵히 가르치고 있다. 1백년을 훨씬 넘긴 천불전 앞 영산홍과 자산홍은 영롱한 빛을 발하고 꽃 한송이 풀 한포기에서도 진리를 찾고 청아하게 살다 간 노승(老僧)들을 연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