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갑사(道岬寺)는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산8번지 월출산(月出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둔사의 말사이다. 월출산은 해발 808m로 '남도의 작은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빼어난 산세와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한 곳이다.
천황봉을 출발해 남서쪽으로 구정봉(743m)이 이어지고 다시 그 남쪽으로 도갑산(376m)이 우뚝 솟았다. 바로 이곳 도갑산을 등지고 주지봉을 바라보는 넓은 대지에 절이 자리잡고 있다.

절의 창건은 신라말 이전에 이루어졌다 한다. 절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일찍이 도선이 머물렀던 곳'이라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활동하던 827년에서 898년 사이에 이미 절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 기록 외에 달리 절의 창건을 고찰할 자료가 없고, 후대에 작성된 <도갑사사적기> 등에서는 아예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적고 있다. 문헌 기록으로는 더 이상의 접근이 어렵고,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하면 그 시대의 흔적을 간직한 유물 자료라도 발견되어야 하나 아쉽게도 절에 전하는 가장 오래된 유물 유적은 고려 초기 이후의 것들이다. 한편 절의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도선의 어머니 최씨가 빨래를 하다가 물위에 떠내려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여 낳았다. 그러나 아비 없이 난 자식이라 비난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숲속에 버렸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아이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기르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최씨는 범상한 아이가 아님을 깨닫고 문수사의 스님에게 맡겨 기르도록 하였다. 장성한 도선은 중국에 다녀온 후 이곳 문수사 자리에 절을 세워 도갑사라 하였다.

전설이나 설화 등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반면 일상의 상식에서 벗어난 극적 전개와 그럴듯한 사실을 담게 마련이다. 도갑사의 창건 전설도 이러한 경우이다. 분명한 창건 사실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구체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창건 사실을 다분히 신비화시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전설이라고 해서 무시해 버릴 수만은 없다. 본래 도선국사는 이 지방 출신이고 따라서 어떤 경우든 절과 연관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의 추론은 불가능하다.
 
창건 이후 고려시대의 역사는 완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으나 조선시대 이후 절의 발자취는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다. <도갑사사적기>를 토대로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절이 중창된 것은 1456년(세조 2) 수미(守眉)선사에 의해서였다.
스님은 영암 출신으로 세조로부터 각별한 존경을 받았던 분인데 이 때의 중창에도 세조의 어명에 의해 국가적 지원이 있었다. 중창을 마친 직후 절에는 966칸에 달하는 여러 전각이 즐비하였고, 부속 암자만 해도 상동암(上東庵) · 하동암(下東庵) · 남암(南庵) · 서부도암 · 동부도암 · 미륵암 · 비전암(碑殿庵) · 봉선암(鳳仙庵) · 대적암(大寂庵) · 상견암(上見庵) · 중견암 · 하견암 등 12개였다.

한편 절에 관한 몇몇 기록들에서는 이 때의 중창을 수미대사와 신미(信眉)대사가 함께 이룬 것이라고 적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수미와 신미 두 대사는 당대의 고승으로서 명망을 얻고 있던 분들이라 이런 착오가 생긴 듯 하지만 사실 도갑사의 중창은 수미대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세조실록」에 보면 1464년(세조 10) 4월 왕은 전라감사에게 명하여 수미의 도갑사 중창을 돕도록 했다. 이처럼 절의 중창 과정에 신미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이 때의 중창은 1456년에 시작하여 1464년까지 계속되었다.
1473년(성종 4) 5월에는 해탈문을 새로 지었는데 이 때도 수미대사가 대시주로 등장하고 있어 수미에 의해 1456년에 시작한 절의 중창은 결국 17년간이나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가 억압받던 시대에 이러한 대규모의 중창불사가 행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도갑사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이후 1555년(명종 10)에는 서남해안 일대에 왜구가 침입하여 노략질을 자행하는 가운데 이곳 도갑사에까지 침범해서 불을 질렀으나 저절로 불이 꺼져 화를 면하기도 하였다. 광해군(재위, 1608∼1623) 때는 낡고 허물어진 전각을 새롭게 중사하였는데, 이 무렵의 상주 대중은 무려 730명이었다고 한다. 1633년(인조 11) 6월에는 <월출산도갑사왕사묘각화상비명(月出山道岬寺王師妙覺和尙碑銘>이 세워졌다. 묘각화상비의 건립은 5년이나 걸렸는데, 스님은 물론이고 지방의 유력 인사들도 동참했다. 또 같은 해에는 절 입구의 돌다리를 중창하고 <월출산도갑사석교중창비>를 세웠으며 국사전에 수미대사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자세히 전하지는 않으나 이러한 여러 가지의 불사가 같은 해에 모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볼 때, 이 무렵 절은 상당히 번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년 뒤인 1653년(효종 4)에는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와 <조계곡석교신창비(曺溪谷石僑新創碑)>가 세워졌다. 이 두 비문에는 당시의 영의정, 형조판서 등 최고의 권력자들이 비문을 짓거나 글씨를 썼고, 또 당대의 고승들이 참여하고 있어 절의 사세를 짐작케 한다. 1655년(효종 6)에는 「묘법연화경」목판본을 간행하여 사세의 신장과 함께 학문과 사상의 진흥에도 힘을 기울였다.

절의 중수는 계속 이어져 1677년(숙종 3)에 당간지주를 세웠고, 1682년에는 대형 석조를 만들었다. 18세기 중엽에는 연담 유일(蓮潭有一) 스님이 절에 머물며 불교사전이라 할 수 있는 「석전유해(釋典類解)」를 편찬했다. 또 절은 1776년(영조 52)에도 중수된 바 있다.
19세기 이후 근래까지의 연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일제강점기와 6. 25등을 거치면서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사세가 많이 약해졌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기록된 글이 없고 절에서도 몰라 그 이상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1977년에 신도의 부주의로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전 건물이 소실되어 예전의 모습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점차 옛 전각에 대한 복원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신라말 창건이래 도갑사에는 많은 고승대덕이 수행과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 분들 가운데는 창건주 도선국사나 중창주 수미대사와 같이 우리 나라 불교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긴 분들이 있는가 하면 지금은 이름조차 알 수 없이 절에 부도만 남아 있는 분들도 10여 분에 이른다.
여기서는 자세한 행장이 전하는 도선국사와 수미대사에 대해서 알아본다.

창건주 도선국사
도선국사(827∼898)는 우리 나라 풍수지리 사상의 시조이다. 신라말에 활약했으나 오히려 고려시대 이후 더욱 유명해졌고, 조선시대까지도 그의 사상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스님의 생애는 많은 부분이 분명하지 않고, 그래서 때로는 지나치게 신비화되기도 하였다.
성은 김씨 또는 강씨라고도 하고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호는 연기(烟起), 자는 옥룡자(玉龍子), 혹은 옥룡이라고 한다. 15세 되던 841년(문성왕 3)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교학을 익혔다. 이후 경전에서 진리를 찾겠다는 생각을 바꾸어 846년(문성왕 8)에는 동리산의 적인 혜철에게서 '무설설 무법법(無說說 武法法)'의 이치를 배웠다.
850년(문성왕 12)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이후, 주로 옥룡사에 머물며 운봉산 · 태백산 · 지리산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움막 수행도 하였다. 지리산에 머물 때 한 도인이 나타나 스님에게 산세의 순하고 거스르는 지세를 터득하는 비방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또한 당나라에 건너가 일행(一行) 선사에게서 비법을 익혔다고 하나 시기상 맞지 않는 말이고, 어쨌든 이후부터 지리와 음양학에 식견이 통달했다 한다.
헌강왕(875∼886) 때는 궁중에 나아가 법문을 펼치기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898년(효공왕 2) 3월 나이 72세, 법랍 57년으로 옥룡사에서 입적했다. 왕이 요공국사(了空國師)라 호를 내리고 탑호를 징성 혜등(澄聖慧燈)이라 하였다. 국사는 일찍이 고려 태조의 탄생과 그의 건국을 예언하기도 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고려시대에 들어와 더욱 추앙을 받아 고려 헌종은 대선사, 숙종은 왕사, 인종은 선각국사를 각각 추증하기도 하였다. 옥룡사와 이 곳 도갑사에 국사의 비가 세워졌지만, 옥룡사의 비는 사라진 지 오래여서 국사의 체취는 이 곳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중창주 수미대사
1456년에 시작한 도갑사의 중창불사는 1464년가지 계속되어 966칸에 달하는 웅장한 가람이 완성되었다. 이 오랜 불사를 이끈 분이 바로 수미(守眉)대사이고, 이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절에 묘각화상비를 건립하였다.
묘각(妙覺)은 스님의 호이고 성은 최씨, 본관은 고랑주(古朗州)이다. 13세에 이 곳에서 출가한 뒤, 공부에 전념하다가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속리산 법주사에서 혜각 신미(慧覺信眉)를 만나 경론을 함께 공부하였다. 두 사람은 계율을 철저히 지키며 열심히 공부하여 이름을 떨치니, 학인들이 '두감로문(二甘露門)'이라 부르며 칭송하였다. 동갑내기인 이들은 「감로문」이라는 책을 함께 짓는 등 평생 도반으로 조선시대 불교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
경전을 통한 교학공부가 원숙한 단계에 이르자 스님은 구곡 각운(龜谷覺雲)과 벽계 정심(碧溪正心)에게서 선을 익혔다. 당시 숭유억불의 이념이 기승을 부리면서 선과 교 할 것 없이 불교가 쇠퇴하자, 스님은 선종판사(禪宗判事)로서 불교의 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도갑사를 떠나 각지에서 수행에 전념하던 스님은 1456년 무렵 절로 돌아와 황폐화된 가람을 중창하기 시작하였다. 20년 가까이 스님은 도갑사에 머물며 각종의 전각을 새로 짓거나 보수하고, 약사여래상 3체를 조성하는 등 사세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 세조와도 인연이 깊었던 듯 왕은 전라감사에게 명하여 절의 중창을 돕도록 했다.
스님은 나이 63세, 법랍 51년으로 입적하니 세조는 그를 왕사로 추존하고 묘각이라는 호를 내렸다. 속리산의 복천암(福泉庵)에 부도가 세워졌고, 1633년(인조 11) 이 곳 도갑사에 묘각화상비가 건립되었다. 위와 같이 스님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15세기 전반에서 후반까지 활동하면서 도갑사를 오늘날과 같은 어엿한 모습으로 발전시킨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절에는 현재 대웅보전을 비롯해서 미륵전 · 명부전 · 국사전 · 요사 · 범종각 · 해탈문 · 일주문 등의 전각이 있다. 유물 가운데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것은 고려시대 석탑이다. 비석으로는 묘각화상비와 도선 수미국사비가 있고, 부도는 11기가 있다. 그 밖에 대웅보전 앞마당에 1677년(숙종 3)에 세원 괘불대와 1682년(숙종 8)에 조성한 석조(石槽), 그리고 팔각의 석조대좌 등이 남아 있어 번성했던 옛 가람의 자취를 느끼게 한다.
한편 1550년(명종 5)에 이곳 도갑사에서 조성되어 대웅전에 봉안했던 관음 32응신도는 지금 일본 교오토에 있는 지은원(知恩院)에 소장되어 있다.

대웅보전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1981년에 원형에 충실히 따라 복원되었다. 본래의 대웅보전은 광해군 때 중수하여 면면히 법등을 밝혀 왔으나, 1977년 화재로 소실되면서 전각은 물론 그 안의 석가삼존과 금동의 육광(六光)보살도 없어졌다.
안에는 목조로 모신 아미타 · 석가 · 약사의 삼세불좌상을 봉안했다. 주존불의 높이는 140㎝, 협시불은 134㎝로 복원 때 함께 조성되었다. 또 후불탱화와 1946년 조성의 칠성탱화, 1981년 조성의 제석천룡탱화, 1989년 조성의 산신탱화가 양 쪽 벽에 봉안되어 있다.

미륵전과 석조여래좌상
대웅보전 뒤쪽 숲길을 지나 150m쯤 지나면 아담한 미륵전이 나타난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 초의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하여 1936년에 조성된 산싱탱화와 1986년 조성된 제석천룡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높이 300㎝로서, 광배와 본존이 하나의 돌로 조각된 특징을 지녔다. 상호는 원만한 모습이며 나발의 머리에 육계가 솟아 있고 눈과 코, 입이 잘 조화를 이룬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옷의 문양이 약간 형식화되기는 했지만, 정제성을 잃지 않고 있다. 수인은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널리 조성된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데 왼손의 팔굽이 조금 굽어져 다소 어색한 모습이다. 광배는 전신을 감싸고 있는 주형(舟形)으로 머리 위와 그 양쪽에 3체의 화불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머리 위로는 8엽의 연화문이 드러나고 그 주변에 당초문과 화염문이 음양각으로 새겨졌다. 대좌는 방형대석으로 하단에 1단의 괴임이 있고 그 밑으로 방형의 중석이 받치고 있다.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을 반영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옷의 문양이나 대좌 등에서 고려적 요소도 많이 지니고 있어 조성시기를 10∼11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존상태가 양호한 고려초의 우수한 불상이어서 보물 제89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미륵전 안에 봉안되어 있어 아마도 이 불상을 미륵불로 모시고 있는것 같다. 그런데 수인을 통해 보면 항미촉지인, 곧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루어 마귀를 물리친다는 수인을 취하고 있어 이 불상의 명호는 석가불일 기능성이 높다.

명부전 . 국사전
명부전은 대웅보전 오른쪽에 위치해 있으며 팔작지붕에 앞면 4칸, 옆 면 2칸 크기이다. 본래 수미대사의 중창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차례 보수가 이루어졌는데, 현재의 건물은 1971년에 복원된 것이다. 안에는 명부세계의 주인공인 지장상과 도명존자 · 무독귀왕, 10구의 시왕상, 판관 · 녹사 · 사자 · 인왕상을 각 2체씩 봉안했다. 또한 지장탱화와 소종도 있으나 최근작이다.
국사전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도선국사 진영과 수미왕사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해탈문
일주문을 지나면 가람 경내에 들어서기 전에 해탈문(解脫門)을 만나게 된다. 중생의 세계에서 더 없는 깨달음의 세계, 해탈의 경지로 이끈다는 이 곳 해탈문은 연대가 분명하며 조선 초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한국 건축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현재 국보 제 50호로 지정되었으며, 안에는 인왕상 2체와 문수 · 보현동자상이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아한 이 건물은 1960년에 해체 보수하면서 <도갑사 해탈문상량문>이 발견되었느넫, 여기에 1473년(성종 4) 5월 기둥을 세우고 상량한다는 건립연대가 적혀 있다.
건축 양식은 조선 초기의 주심포 양식으로서, 정면 중앙칸은 통로인데 이곳을 거쳐 피안의 세계 대웅보전으로 다가간다. 중앙칸의 창방 위에 '월출산도갑사'라는 현판을 걸어 이 곳이 절의 정문임을 나타내고, 한 칸 안으로 들어서면 비로소 해탈문의 현판이 보인다. 양 협칸에는 인왕상 2체와 문수 · 보현동자가 모셔져 있다. 인왕상은 악귀를 물리치고 불법을 보호하며, 문수 · 보현동자는 각각 지혜와 자비의 상징이므로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는 중생들을 안온하게 맞이한다는 의미가 깃들여 있다.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은 상량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왕사(王師) 수미가 대시주이고, 대선사 각여(覺如)가 대목(大木), 대선사 의명(義明)이 부대목(副大木)을 맡았다. 그 밖에 불사에 참여한 인물로는 해명(海明) · 성명(省明) · 조명(祖明) · 해종(海宗), 그리고 지사(持寺)를 맡았던 홍월(洪月) 스님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도갑사 오층석탑
대웅보전 앞마당에 있는 고려초 작품으로서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 151호로 지정되었다. 본래부터 지금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언제인가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 현재 하대석 일부가 없어진 채 기단 아래 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초층 기단에 5층의 탑신, 그리고 상륜부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4매의 면석과 2매의 갑석으로 짜여졌는데 각 면에는 우주 및 탱주가 새겨졌으며 갑석 위에 있는 1단의 각형 괴임이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이고 각 옥개석은 옥개받침이 3층까지는 5단이다가 4층은 4단, 5층은 3단으로 점차 줄어들면서 옥개석의 크기에 따라 옥개받침의 개수도 차츰 줄여 나갔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평평하고 네 귀퉁이의 전각은 밋밋하게 내려오다 끝에서 조금 치켜 올라갔다. 상륜부는 노반과 보주로 이루어졌으나 본래의 것이 아니라 후에 보수한 듯 석질과 색이 다르다. 현재 높이는 460㎝이다.

삼층석탑
대웅보전 뒤뜰에 있는 고려시대 탑으로서 높이 255㎝이다. 본래 대웅보전 앞에 있었으나 근년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단층 기단에 3층의 탑신과 상륜을 모두 갖췄다. 기단은 1매의 지대석 위에 4매로 이루어진 면석과 1매의 갑석으로 되어 있다. 기단부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고 면석의 각 면에는 우주를 새겼으며 중앙에 한 개의 탱주를 나타냈다. 갑석은 1매로서 하단에 1단의 부연을, 상면에는 3단의 괴임을 두어 탑신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을 별도로 마련했고, 탑신에는 탱주가 없이 우주만 있다. 옥개석 받침의 1∼2층은 3단이며 3층에서는 2단으로 줄었다.
옥개석의 일부분은 많이 파손되었지만,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끝부분에서 반전을 이루었다. 상륜부에 노반과 복발, 그리고 옥개석 비슷한 석재가 놓여 있다.

묘각화상비
대웅보전 뒤쪽 빈터에 있는 이 비는 도갑사의 오늘날에 있게 한 중창주 수미대사를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서, <월출산도갑사왕사묘각화상비명>이라고 한다. 방형의 대좌 위에 귀부를 얹고, 그 위로 비신과 이수를 올린 형식이다.
대좌 위로 비신이 바로 연결되며 명문은 앞뒤에 모두 새겼다. 앞면은 수미대사의 생애와 비의 건립연대, 뒷면은 건립에 참여했던 승려와 지방 인사 및 시주자 명단으로 새겨져 있다. 비의 건립은 1629년(인조 7) 2월에 시작하여 1633년(인조 11) 6월에 완성하였으며 비문과 글씨를 백암 성총 스님이 손수 짓고 썼다.

도선. 수미대사비
대웅보전에서 미륵전으로 올라가는 숲길을 따라 동남쪽으로로 약 200m 쯤에 있다. 총 높이 513㎝인 이 비의 정확한 이름은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며 현재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비문에는 도갑사의 창건주 도선국사와 조선시대에 절을 크게 중창한 수미대사의 행장이 적혀 있다. 1636년(인조 14)에 시작해서 1653년(효종 4)에 완성되었는데, 도선국사의 행장을 담고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비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광양 옥룡사에 국사의 비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지고 비문만이 전한다.
비의 형태는 대좌와 귀부가 한 돌로 되어 있다. 비신은 높이 263㎝이며, 앞뒷면에 비문을 음각하였고 옆면에는 구름 속에 뚫고 승천하는 용의 문양을 정교하게 부조했다. 비문은 크게 나누어 앞면의 비문과 뒷면의 음기로 구분되는데, 앞면의 비문은 비문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이 각각 다른 두 개의 비문으로 이루어졌다. 즉 비문 왼쪽의 글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지었으며, 글씨는 예조판서 오준(吳竣)이 썼다. 또 비문 오른쪽의 글은 홍문관부수찬 이수인(李壽仁)이 쓰고, 글씨는 성균관 진사 김시간이 썼는데 왼쪽에 적힌 비문에 참여했던 사람들보다 하위 관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비문의 내용을 통해 본래 절에는 도선국사의 비가 있었으나 너무 오래되어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마모가 심하였고, 이에 따라 옥습(玉習) 스님이 발원하여 비를 새로 건립했다는 경위를 알 수 있다.
비석 뒷면의 음기는 도선국사에 관한 내용으로만 이루어졌다. 사실 이 비는 도선과 수미대사에 관한 비이건만 수미대사에 관한 내용은 도갑사를 중창했다는 단 몇 줄에 불과하고 대부분 도선국사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다. 그런데도 수미대사의 이름을 비 제목에 당당하게 내세운 것은 아마도 비를 건립한 옥습 스님 등이 수미대사의 법을 이어받은 제자였기 때문인 듯하다. 절을 창건했다는 도선국사의 업적과 절을 크게 중창한 수미대사의 공로를 같은 비중으로 하나의 비에 함께 기록함으로써 스승에 대한 예우를 다하기 위해서 비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게다가 수미대사에 관해서는 이미 이 비를 건립하기 20년 전에 세운 묘각화상비가 있어 상세하게 기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부도군
해탈문에 이르기 전의 왼쪽 숲속에 부도들이 모여 있다. 본래 이 부도들은 대웅보전 남쪽 100m 쯤 떨어진 계곡에 흩어져 있거나, 또 일부는 미륵전 부근에 방치되어 있다가 1985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대부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형태는 종형과 팔각원당형이 있는데 양식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절을 거쳐간 고승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전부 11기의 부도 가운데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것은 영백당과 서령당 부도뿐이다.

도갑사 관음 32응신도
1550년 도갑사의 금당에 아름다운 불화가 한 점 봉안되었으니 지금은 일본의 지은원이라는 절에 보관되어 있는 관음 32응신도가 그것이다. 이 불화는 조선시대 불화 가운데 연대가 확실하고, 또 하나밖에 없는 관음 32응신도라는 점에서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불화는 그 구도와 색채가 지니는 뛰어난 예술적 아름다움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불화의 조성은 당시 인종의 왕비인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돌아가신 임금의 명복을 빌기 위해 널리 인재를 모집하고서, 마침내 이자실(李自實)로 하여금 불화를 조성케하여 이를 도갑사 금당에 보내 봉안했다. 왕실의 발원으로 전왕(前王)의 추선명복을 비는 뜻에서 조성하였으니 당대 최고의 화가가 참여하였음은 물론이다.
가로 135㎝, 세로 235㎝의 비단에 채색된 화면 중앙에는 온갖 보관과 영락으로 치장한 관음보살이 편안한 유희좌로 앉아 있다. 그 위로는 두 분의 여래가 각각 설법인과 항미촉지인을 취하고, 다시 그 좌우로는 합장한 여래 열 분이 상서로운 구름에 둘러싸여 있다. 화면의 3분의 2가 넘는 공간에는 산수를 배경으로 관음보살이 응신(應身)한 장면을 가득 담고 있는데 각 장면마다 금칠로 도상의 내용을 명기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관음보살은 대자대비를 근본 서원으로 한다. 그러기에 중생의 온갖 고뇌에 찬 음성을 모두 관(觀)한다고 해서 관세음보살이고, 또 그 중생의 근기를 관찰함에 있어서 자재(自在)한다고 해서 관자재보살이다. 관음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갖가지 모습을 나타낸다. 대표적인 경우가 「법화경」에 나타나는 33응신으로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한다. 바로 이러한 보문시현이 이 관음 32응신도에 그대로 표현된 것이다.
전체적으로 황색과 녹색을 많이 사용하면서 섬세한 수목과 바위산, 그리고 인물의 표현을 매우 섬세하게 묘사했다. 조선시대의 불화가 지니는 일반적 도상과 분위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데, 한편으로 보면 격조 높은 산수화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는 조선 중기 이후의 불과가 대개 승려 신분의 화사(畵師)에 의해 조성되면서 신앙적 의례적 요소에 충실했던 반면 이 불화는 승려가 아닌 전문 직업적 화공(畵工)에 의해 조성되면서 불화와 산수화의 복합적 성격이 혼합되어 창충해 낸 독특한 경우이다. 또한 이 불화는 조선 중기 이후 점차 퇴보해 가는 조선 불화의 여러 예와 비교할 때 이 시대 최고의 우수작이라 할 만하다.
지난 1993년 호암갤러리에서 동국대학교와 공동으로 〔고려불화특별전〕이 개최됐을 때, 이 불화는 실로 수백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많은 사람이 직접 이 불화를 보면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는데, 그러나 짧은 방문 기간을 마치고 돌아가야 했다. 굴곡 많은 역사의현실이기는 하지만 불화를 친견한 많은 사람들은 돌아가야만 하는 불화의 운명에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본래 봉안되었던 도갑사에 실물 크기의 사진으로라도 봉안한다면 그 섭섭함이 조금은 덜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