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황사(美黃寺)는 우리나라 불교 해로유입설을 뒷받침하는 고찰로서 옛날에는 크고 작은 가람이 20여동이나 있었던 거찰(巨刹)이거니와 대웅전은 보물 제947호로서 그 규모나 정교함에 있어서 매우 훌륭한 건물이다.
신라시대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창건했다는 이곳은 1692년 숙종 18년에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지은 '미황사 사적기'에 창건에 얽힌 신비로운 전설이 전한다.

때는 신라 35대 경덕왕 8년(749) 돌배(石船) 한 척이 홀연히 달마산 아래 사자포에 와 닿았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가까이 오기를 며칠동안 계속했다. 의조화상이 정운, 장선 두 사미승과 향도 백명을 데리고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니 배가육지에 닿았다. 배 안에는 금으로 된 뱃사공과 금함, 60나한, 탱화 등이 가득 차 있었다. 또 검은 바위를 깨뜨리자 소 한마리가 뛰쳐 나오더니 삽시간에 큰 소가 되었다.

이날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金人)이 나타나 "나는 우전국(인도) 사람인데 이곳 산세가 일만 불을 모시기에 좋아 보여 인연토(因緣土)로 삼았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실고 가다가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절을 세우라"고 하였다. 다음날 스님은 그 말대로 했는데 소가 달마산 중턱에 이르러 한 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한참을 가다 크게 울며 넘어지니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 소가 누운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그 다음 자리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란 이름은 소가 울 때 그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워 미(美)자를 취했고 금인(金人)의 황홀한 빛을 상징하여 황(黃)자를 취해 지었다고 한다.

미황사가 있는 서정리는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의하면 영암군 송지종명의 지역으로서 우분리(牛糞里)라고 불리었다. 우분리라는 지명은 미황사 창건설화와 연결되고 있는데 불경을 짊어지고 쓰러져 죽은 소를 이 마을에 묻어 황소가 죽은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미황사가 한창 번성할 때는 통교사를 비롯 도솔암, 문수암, 보현암, 남암등 12암자가 즐비한 사찰로 대흥사의 가장 큰 말사(末寺)였다. 하지만 크게 융성했던것 만큼이나 폐망 또한 폭풍속 바다에 수장된 것으로 끝나 허망함을 느끼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150년전쯤 당시에는 이곳 치소 마을 출신의 혼호스님이 주지로 있었고 40여명의 스님이 머물만큼 부자절이었다. 그때 더 큰 중찰부사를 일으키기 위해 이 절의 스님들이 군고패(풍물놀이의 일종)를 차려 해안지방을 돌며 시주를 모았다. 그러나 완도 청산도로 공연을 가던중 폭풍을 만나 배가 파선돼 떼죽음을 당하니 절을 지키던 스님들의 맥이 끊길 수 밖에.
지금도 청산도 사람들은 미황사 스님들이 빠져 죽은 그 바다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이면 군고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미황사 대웅전은 잘 생긴 절터 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때 불탄 것을 1754년 영조때 중건(重建)했으며 그 생김새가 화려하고 정교하다. 조선후기 다포양식(多包樣式)의 건축으로 단연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솜씬데, 막돌허튼층쌓기 형식인 기단위의 우아한 차림새와 내부를 장식한 문양과 조각이 찬탄할 만한다.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으로 내부로 뻗은 살미의 끝은 날카롭게 앙설로 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하나의 판으로 붙어 있으면서 그 끝은 연봉형으로 마감 했다. 주간포는 전면에 2구, 양측면에는 1구씩 배치했다.

건물안에는 나한상(羅漢像), 동자상(童子像), 신장상(神將像) 등이 벽화로 그려져 있으며 종이에 그려진 여래상(如來像) 또한 벽면에 붙어 있다. 이 벽화들은 10세기경의 그림으로 추정되어 불화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하지만 10여년전 두 벽면의 벽화가 벽채로 도난당한 일은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영험있는 하느님의 마누라로 통하는 미황사 괘불은 지금의 대웅전이 중건되기 전인 1727년경에 제작된 조선후기 괘불로 높이 10여m의 위용을 자랑한다. 괘불은 탱화와 같은 거대한 걸개그림으로 평소에는 법당안에 모셔져 있다가 야외법회가 있을시에 내걸게 되는데 미황사가 번창했던 때에는 그런 규모의 집회가 자주 있었던 것 같다.

괘불에는 가뭄에 내걸고 제사를 지내면 비가 내린다는 속설이 있는데 돼지를 잡아 사찰 주변에 피를 뿌리고 지극정성으로 기우제는 모시면 하느님이 자기 마누라가 있는 곳이 지저분해 비를 쏟아부어 씻어낸다는 것이다. 요즘에도 가뭄이 들면 미황사에서는 기우제를 지내는데 실제로 몇 년전 괘불을 내걸고 기우제를 지냈는데 도중에 빗줄기가 쏟아져 괘불이 흠뻑 젖어버린 수난을 치르기도 했다. 1992년에도 30년만의 극심한 가뭄이 들었는데 미황사 괘불이 어김없이 신통력을 발휘했다.

음력 유월 스무날 가뭄에 목이 타던 서정리, 치소리, 장춘리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달마산 봉화대에 불을 지폈는데 우연이랄까 그 다음날 비가 내려 갈증을 모면했다고 한다. 기우제가 민간신앙에 널리 퍼져있는 유형이라고는 하지만 미 황사의 경우처럼 불교와 어우러져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한다.
 
미황사에는 총 28기의 부도(浮屠)가 있다. 대웅보전을 따라 남쪽으로 약 500m쯤 가다보면 21기의 부도가 있는 서부도전이 나온다. 그리고 미황사 입구 주차장의 한쪽 귀퉁이에 부도가 있다. 전반적으로 18세기에서 19세기에 조성된 이 부도들은 그 양식의 파격성과 조각수법의 치졸함, 그리고 조성된지 오래되지 않았던 점등으로 인해 세인의 관심밖에 있다가 1986년 목포대학 박물관학술총서 제5책에 발표되면서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울창한 숲 속에 쌓여있는 돌무덤들, 푸른 이끼와 함께 정갈하고 풍화된 색조는 찾아오는 이 없는 산중속에서 의연함을 내비치듯 은은하기만 하다. 이 부도밭은 그 옛날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끊이지 않았던 도량(道場)으로서 미황사의 번창했던 역사를 반증하고 있는데 아마 대흥사 부도밭과 함께 우리나라 사찰중에서 최대의 부도밭일 성 싶다.
 
한 향토사학자에 의하면 달마산은 옛날의 송양현(松陽縣)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은 해남군 현산, 북평, 송지등 3개면에 접하고 해남읍으로부터 약28km 떨어져 있다. 이처럼 삼면에 위치하면서 두륜산과 대둔산의 맥을 이어 현산이 머리라면 북평은 등에 또 송지는 가슴에 해당한 형상이다. 또 사구, 통호, 송호 등의 산맥을 지맥으로 이루면서 한반도 최남단 땅 끝 사자봉에 멈춘 듯 하지만 바다로 맥을 끌고 나가 멀리 제주 한라산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명산(名山)이다. 이렇듯 수려한 산세가 유서깊은 천년 고찰(古刹) 미황사를 있게한 것이다.

또 옛날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완도의 숙승봉과 북일 좌일산에서 서로 주고 받던 곳으로 잔허가 남아 극심한 가뭄이 오래 계속되면 480m의 이 높은 봉에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했다 한다. 고려시대 고승인 무애는 또 달마산의 형상을 살펴 이렇게 표현했다.
북으로 두륜산 접해있고 삼면은 모두 바다와 닿아 있는 산. 산호리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무성하여 모두 백여척이나 되는 것들이 치마를 두른듯 서 있다. 그 위에 마주한 기암괴석들이 우뚝 솟은 깃발과도 같다. 혹 사자가 찡그리고 하품하 는 것 같고 또는 용과 범이 발톱과 이빨을 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멀리서 바라보면 하얗게 쌓인 눈이 공중에 한발짝 다가서 서있는 듯하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길이나 되는 벽 아래 미타혈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세 사람은 앉을만 하다. 그리고 앞에는 층대가 있어 창망(蒼茫)한 바다와 산들이 서로 가까이 있는 듯하다.
 
도솔암에서 다시 아래로 100여m를 내려가면 용담(龍潭)이라는 샘이 나온다. 이곳에는 어른 4∼5명이 들어살 수 있는 굴 속에 샘이 일년내내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고여있어 신비함을 느끼게 한다.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이 도를 닦으며 낙조를 즐겼던 곳이기도 한데, 용담은 무당굿을 벌인다. 그래서 용샘주위엔 그들이 밝혀놓은 촛불이 꺼지지 않는다.

용샘이 있는 굴안에는 3M정도 높이의 바위벽에 또 2개의 굴이 뚫려있다. 이 굴은 '용굴'이라고 하는데 옛날 그 속에서 2마리의 용이나와 승천(昇天)했다는 것이다. 바위 앞에서 용이 입을 벌려 바위가 뚫리고 용이 뿔로 받아 바위에 뿔구멍이 생겼다고 전하기도 한다. 용굴주위는 으스스한 정도로 서늘해서 여름에 물을 마시며 피서하기에 좋다.

용담의 물 맛은 텁텁하면서도 바위가 우려내는 물답게 짜릿한 기운이 감돈다. 맑고 깨끗하기가 이를데 없다. 용담물은 가끔 누런빛을 띠는데 하늘로 올라가던 황룡(黃龍)이 아쉬움에서 자신 몸에난 가루를 샘벽에 묻혀 두고 갔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렇듯 신비스런 얘기와 함께 심상치 않은 샘으로 알려진 용담은 복을 빌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더욱 바빠진다. 용담신앙의 뿌리는 점점 깊게 넓게 퍼지고 있는 것이다.
 
금빛 띠를 두루며 반짝거리는 샘. 마치 삼라만상(森羅萬象)을 거둬내고 해탈(解脫)을 꿈꾸는 수도승(修道僧)의 모습처럼, 누런 광채를 뿌리는 금 샘. 달마산의 문바위재라 불리는 정성부근에서 갈대밭을 헤치고 동쪽으로 가파른 고갯길을 60m 쯤 내려가면 앞이 확 틔이는데 바로 이곳의 전면 거대한 바위틈에 샘이 하나 뚫려있다. 땅바닥으로부터 사람 가슴 높이쯤에서 바위벽이 수평으로 1m정도 패어 들어간 자리에 0.3∼0.4m 깊이로 석간수(石間水)가 고여있고 남은 물은 조금씩 이끼 낀 돌틈새로 넘쳐 흐른다. 수면이 온통 '금가루'로 덮여 있는 금샘은 누군가가 일부러 파 놓은것 같기도 하고 저절로 생긴 샘인듯 하지만 일부러 판 것이라면 하필 기면 바위벼랑속에 이처럼 신기한 물줄기가 흐르는 줄 알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이런 궁금증을 안고 바가지를 내밀어 금가루를 흐트려뜨리고 물을 떠보지만 금빛만이 쏙 빠져나간채 맑은 물만 가득 채워져 있다. 음양오행상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의 산에 그 기운을 이기고 솟아 오르는 물의 생명력, 금샘의 찬란한 황금및 세상은 이러한 불성의 극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