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白蓮寺)는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11번지 월출산(月出山) 남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둔사의 말사이다.
절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이고 조선 후기에 만덕사(萬德寺)로 불리다가 근래 다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창건은 대웅보전에 있는 중시기 현판에 의하면 통일신라 시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6) 때 무염(無染, 801∼888) 스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전하지만 현판이 18세기에 쓰여진 것이라서 확실한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
 
절은 그 뒤 고려시대인 1211년(희종 7)에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에 의해 중창되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요세는 이보다 앞서 월출산 약사난야(藥師蘭若)에 거주했는데, 이 지방의 독실한 불교 신자인 최표9崔彪) · 최홍(崔弘) 형제와 이인천(李仁闡) 등의 요청으로 만덕산에 옮겨와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 · 지담(之湛) · 법안(法安) 등으로 하여금 건물 80여 칸을 짓게 하고 1216년(고종 3)에 낙성법회를 열었다. 그 뒤 요세 스님은 1221년에 남원 태수 복장한(卜章漢)의 청으로 관내에 제2의 백련사를 설치하고 몇 년을 그곳에서 머무르다가 1223년 최표의 간청으로 다시 백련사에 돌아와 도량을 크게 넓히고 법석을 마련했다.
요세의 입적 이후 절은 천인 · 원환 · 천책 등으로 이어지면서 법맥을 이어나갔는데, 고려 중후기의 역사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르러서 절은 왜구의 노략질로 폐사가 되다시피 했다. 조선 초기에 들어와서는 1407년9태종 7) 12월의 나라에서 실시한 2차 사찰 정리기에 조계종 자복사(資福寺) 24개 사찰 중에 소속되고 있어, 비록 고려 말에 왜구의 침략으로 사찰이 많이 훼손되기는 하였으나 그 명맥은 계속 유지해 갔다고 여겨진다.

절은 그 뒤 14265년(세종 8)에 천태종 승려 행호(行乎) 스님이 크게 중창하였다. 천태종의 영수이며 도대선사(都大禪師)의 칭호를 갖고 있던 행호 스님은 임금의 장수와 국가의 복락을 비는 서원(誓願)을 하면서 제자 신담(信湛)등으로 하여금 여러 단월에게 시주를 권유하도록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효녕대군9孝寧大君)에게 편지를 보내 대공덕주가 되어 줄 것을 청했고, 효녕대군은 기쁜 마음으로 시주하고 힘을 더해 주었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들었는데, 특히 조수와 강습이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이 중창 불사는 1430년에 시작하여 1436년에 준공되었는데, 이로써 불전과 승료가 옛모습을 회복하게 되었다. 효녕대군은 왕위를 세종 임금에게 양보하고 사찰을 유람할 때 백련사에 8년 동안 머물렀는데, 이때 밭 54두 2승락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그 뒤 1621년(광해군 13)∼1627년(인조 5) 사이에 취여삼우(醉如三愚) 스님이 법회를 열며 옛날 모습을 되찾았다. 취여는 청허 휴정의 제자인 소요 태능(消遙太能)의 제자로서 백련사의 맹주가 된 것이다. 조선 후기에도 만덕사는 몇 차례 중수되었다. 1650년(효종 1)∼1659년(효종 10) 사이에는 현오(玄悟) 스님이 서원9西院)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 절의 탄기(坦寄) 스님이 본사의 사적이 오래되어 없어져 버릴 것을 염려하여 조종저(趙綜著)에게 글을 청해 <백련사사적비>를 1681년9숙종7)에 세웠다. 1760년(영조 36) 2월에는 큰불이 일어나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절의 여러 스님이 중건을 서원하고는 각자 분담해서 시주를 모아 이듬해 4월8일 불사를 시작, 1762년 4월 13일 대법당의 중건을 마무리했다. 이같은 사실은 대웅보전을 걸려 있는 중수기 현판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의 일은 잘 알 수 없고, 20세기에 들어와선느 1908년(융희 2) 서울에 거주하는 효녕대군의 자손 이정재가 효녕대군이 절에 기부했던 밭 54두 2승락과 함게 효녕대군이 거처하던 동전(東廛)을 철거해 그 목재를 되가져 갔다. 이리하여 절은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되어 사찰의 유지가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한다.
 
원묘국사 요세
원묘국사(園妙國師) 요세(了世, 1163∼1245) 스님은 고려 중기 천태종의 고승으로서 백련사를 중창한 분이며, 현재의 경상남도 의령인 신번현(新繁懸)의 호장을 지낸 아버지 서필중(徐必中)과 어머니 서씨 사이에 합천에서 태어났다.
1174년 (명종 4) 합천 천락사에서 출가해 균정스님을 은사로 천태교관을 닦았다. 1185년 승과에 합격하고, 그 뒤 천태종지에 뜻을 균정스님을 은사로 천태교관을 닦았다. 1185년 승과에 합격하고, 그 뒤 천태종지에 뜻을 두고 널리 강의에 참석하여 수련을 쌓은 결과 몇 년이 못되어 일가를 이룰 만한 덕망을 얻게 되었다. 1198년 후진 양성과 수련을 위해 전국 유명 사찰을 찾아 순례하다가 영동산 장연사에서 법회를 열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때 지눌이 팔공산 불갑사에서 그 소문을 듣고 선을 수행하자는 내용의 시를 보냈는데, 서로 뜻이 맞아서 오랫동안 함께 지냈다. 지눌은 1190년부터 거조사에서 정혜결사운동을 다지고 있었으므로, 이 동안 요세는 정혜사의 선 수행법을 익힐 수 있었다.
스님은 1208년(희종 4) 영암 월생산(월출산) 약사사에 거주하고 있을 때, 천태종 중흥의 사명을 자각하고 "만약에 천태의 묘해를 발하지 못하면 영명 연수(永明延壽)의 120가지 병(病)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자각은 요세가 지눌의 조계선에서 천태선으로 복귀하는 사상적 전화점이 되는 동시에, 위에 전개되는 백련결사운동의 기본 입장이 되었다.
1211년에는 강진의 불교 신자 최표 · 최홍 · 이인천 등의 간청으로 수행 장소를 만덕사 옛터로 옮기고 절을 새롭게 지어 천태종 중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1221년 봄 남원태수 복장한의 요청으로 관내 백련산으로 옮겨 몇 년을 주석하다, 1223년 최표 등의 간청으로 다시 만덕사에 돌아왔다. 스님은 1232년(고종 19) 4월 8일 처음으로 만덕사에서 보현도량을 결성하고 전통적인 법화삼매참회를 닦았다. 도량의 명칭을 보현도량이라고 한 것은 <법화참의>에 나타난 참회의 주존이 보현보살이기 때문이다. 백련결사운동은 보현도량의 개설을 계기로 그 체제가 정비되었고, 백련사라는 결사 명칭도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백련결사 운동의 구체적 내용은 천태지관, 법화삼매참, 정토왕생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요세의 백련결사에 참여한 훌륭한 제자만도 38명이었으며, 국왕 이하 지방관, 서민에 이르기까지 직접 결사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300여명이나 되었다. 그 밖에 멀리서 결사에 인연을 맺은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1237년 고종은 요세에게 선사의 법계와 세찬을 내렸으며, 강종의 서녀이며 최충헌의 부인인 정화택주는 백련사의 외호에 힘써 무량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였을 뿐만 아니라 「금자법화경」을 사경하도록 했다. 1240년 「계환해법화경」을 개판하여 보급하였는데, 당시의 권력자 최이(崔怡)가 책의 발문을 썼다. 백련사 보현도량은 이와 같이 최씨무인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그 비호로 급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요세는 50년 동안 수도인 개경에 발을 붙인 적은 없었다.
1245년 4월에 제자 천인에게 백련사를 맡기고 별원으로 물러나 같은 해 7월 입적하였다. 시호는 원묘국사, 탑명은 중진이며 자는 안빈(安貧)이다.
요세 스님은 천성이 순후하여 꾸밈이 없으며 눈으로 삿된 것을 보지 않았고 말을 함부로 하지도 않았다. 또한 밤에는 등불을 켜지 않았으며, 잠잘 때는 요를 깔지도 않았고, 시주물은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오직 옷 세벌과 발우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또한 일상생활에서도 매일 참선을 했으며 경전을 가르치는 여가에 「법화경」한 부를 외우고, 준제신주를 1000번, 나무아미타불을 1만 번 염송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준제신주를 염송한 것은 그 당시 천태 밀교가 융합되었기 때문에가능한 것이었다. 백련사의 보현도량에서는 「계환해법화경」이 채택되어 널리 신앙되었다. 그것은 「화엄경」과 「법화경」이 다 같이 문수보살에서 시작하여 보현보살에서 끝난다는 독특한 법화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스님은 일생 동안 참회를 행하고 강조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참회'로 불렀다고도 한다.
저서로는 「삼대부절요」가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천책
천책 스님은 고려 고종 때의 천태종 고승인데 생몰년을 알 수 없다. 성은 신씨(申氏)이고 자는 몽차이다. 어렸을 때에 급제하여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무상을 느끼고 백련사에 출가하여 백련결사를 제창한 원묘국사의 제자가 되었고, 그 법을 이어받아 백련사의 제4세가 되어 천태종풍을 떨쳤다. 그는 만년에 용혈암에 거주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용혈존숙'이라 불렀다. 시호는 진정국사(眞靜國師)이며, 저서로는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1권과 「법화해동전홍록(法華海東傳弘錄)」 1권, 「호산록(湖山錄)」2권 등이 있다. 선문보장록은 선을 높이 내세우고 교를 낮추어 보고 있어 천책의 저서가 아니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 법화해동전홍록」은 「법화경」의 영험설화를 수록한 것으로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 요원(了圓)이 지은 「법화영험전」에 많이 인용되어 있다.

운묵
고려 후기 백련사의 고승인 운묵(雲默) 스님은 호가 부암(浮庵), 자가 무기(無寄)로서 정확한 생몰년대는 모른다. 일찍이 백련사에 출가해 천책의 제자 불인 정조 국사 이안(而安)의 제자가 되었다. 스승의 밑에서 천태교학을 공부한 뒤 천태선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 때 굴암사의 주지에 임명되었으나 명리를 버리고 다시 수행의 길에 올랐다. 금강산 · 오대산 등 명산대찰을 유력하다가 시흥산에 이르러 암자를 짓고 머물렀다. 그곳에서 「묘법연화경」을 독송하고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을 일과로 삼고 틈틈이 불화를 그리며 20여 년을 지내다 입적했다. 저서로는 「석가여래행적송」2권과 1책과 「천태말학운묵화상경책」1권이 있다.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1702년에 중건되었다. 현판의 '대웅보전'글씨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로써, 1755년 진도로 유배된 이후 어느 때인가 이곳에 들러 쓴 듯하다.
건축 양식을 보면, 기단을 높이 쌓아 경사면을 고르고 건물을 안치했는데 건물의 뒷부분에도 3단으로 높은 축대를 쌓았다. 공포는 다포식이고,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중앙 부분을 한 단 높게 처리하여 내부 공간을 크게 활용하고 있다. 앞면 중앙 기둥머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해 놓아 단청과 함께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을 준다.
안에는 나무로 모신 석가 · 약사 · 아미타불의 삼세불좌상이 있다. 높이가 150㎝인 본존불은 머리가 나발이며 머리 위에는 조그만 보주형 육계가 솟아 있고 그 아래에 계주를 표시하였다. 두꺼운 느낌을 주는 옷자락이 양어깨를 감싸고 가슴에는 내의 자락이 표현되었고, 항미촉지인을 한 오른손을 가부좌한 무릎 위에 놓았다. 양협시불은 본존불과 유사한 모습이지만 중품하생인을 하고 있는 손 모양이 다르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삼세불 뒤에는 1765년(영조 41)에 그린 영산회상도 · 약사회도 · 미타회도를 한 폭에 그린 가로 400㎝, 세로 450㎝의 후불탱화가 있었으나 최근에 자취를 감추었다. 대웅보전 동쪽 벽에도 1773년에 그린 삼장탱화가 있었지만 후불탱화와 같이 도난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서쪽 벽에 신중탱화만 모셔져 있다. 한편 안에는 전각의 중수 사실을 알려주는 중수기 현판 2매가 걸려 있어 참고가 된다. 하나는 <백련사대법당중수기>로서, 대웅보전의 중건 배경과 연도 및 불사에 참여한 스님들의 이름을 알 수 있다. 내용을 보면 1760년(영조 36) 2월에 큰불이 일어나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왈찰(曰刹) · 지정(智正) · 혜철(惠哲) · 태화(太和) · 신징(愼澄) · 규연(圭演) · 찰연(察演) · 윤철(閏哲) · 연징(蓮澄) · 붕관(鵬寬) 스님 등이 중건을 서원하고는 각자 분담해서 여러 곳에서 시주를 모아 이듬해 4월 8일 불사를 시작, 1762년 4월 13일 대법당 등의 중건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이 중수기는 동강(桐岡) 이의경(李毅敬, 1704∼1778)이 지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설 지일(晶雪智逸) 스님이 지은 <해탈문중수기>인데, 1836년(헌종 2) 해탈문을 중수한 사실이 적혀 있다. 해탈문은 지금은 없지만 당시에는 만경루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그밖에 안에는 사자(獅子)를 조각해 법고를 받치도록 고안한 법고대(法鼓臺)와 반자(飯子)가 하나 있다. 법고대는 법고보다 오래된 것인데, 연잎 형태를 한 받침 부분의 지름으로 보아 본래의 법고는 현재 것보다 더 컸던 듯하다.

명부전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안에는 지장상을 비롯해서 무독귀왕 · 도명존자 및 시왕 10체와 판관 · 녹사 · 인왕상 각 2체 그리고 사자상 1체 등 지장보살의 권속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안에는 1775년(영조 51)에 정암 즉원(晶巖卽圓, 1738∼1794) 스님이 지은 <시왕전중수기> 현판이 있어 연혁을 아는 데 참고가 된다.

칠성각 . 응진당
칠성각은 맞배지붕에 앞면 2칸, 옆면 1칸이며 안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가 있다. 산신탱화는 가로 83㎝, 세로 104㎝로서 1931년에 봉안되었는데 본래는 대웅보전에 있었다.
응진당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석가모니불상을 비롯, 아난 · 가섭 등의 16나한상 및 영산회상도가 있다.

만경루
맞배지붕에 앞면 5칸, 옆면 2칸이다. '만경루'현판은 대웅보전 현판과 마찬가지로 이광사가 썼고, 그밖에 1817년(순조 17) 응언(應彦) 스님이 지은 <만덕사고려팔국사각상량문>이 있다. 또한 1969년에 주조한 중종도 있고, 만경루 옆에는 맷돌이 있다.

백련사사적비
1681년(숙종 7)에 탄기 스님이 절의 사적이 오래되어 없어져 버릴 것을 염려하여 세웠다. 귀부는 목을 짧게 조각하고 긴 수염은 늘어뜨려 움츠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등위의 귀갑(龜甲) 안에는 5∼6잎의 꽃무늬를 조각하였으며 중앙에는 굵게 양각한 넝쿨무늬를 배치하여 사각형의 비좌를 에워싸고 있다.
다산 정약용이 감수하고 편집한 「만덕사지」에 이 귀부와 관련된 흥미 있는 기록이 있다. 「만덕사지」 4권에 보면, 이 비문을 요약하여 적으면서 그 끝부분에 '옛 비는 유실되어 그 소재를 알 수 없고 귀부만 남았는데 탄기 스님이 다른 돌로 비를 세우면서 옛날 비석의 귀부를 사용하였다.'라고 주를 달아 놓은 것이 그것이다. 또한 비문에도 '학사 최자(崔滋)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원묘국사의 비가 있었지만 유실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두 가지의 기록을 근거로 해서 이 사적기에서 옛 비라 지칭한 비는 곧 비문에서 말하는 원묘국사의 비석이고 귀부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
옥개석은 아랫면에 서까래와 부연을 조각하고 윗면을 우진각지붕 형태로 하고 용마루에는 용을 조각했다.
비문의 글씨를 쓴 낭선군 이우는 선조(宣祖)의 증손으로 이외에도 많은 불교 금석문에서 글씨를 남기고 있다. 그 가운데 순천 송광사사적비, 평강 보월사중수비, 영변 보현사풍담대사비는 백련사사적비와 같이 조종저가 글을 짓고 낭선군 이우가 글씨를 쓰고 낭원군 이간이 두전을 쓴 것들이다.